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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 않고도 믿는 자 행복하다
새우골  2018-11-14 23:36:37, 조회 : 53, 추천 : 13


몇 달 전 가까운 후배가 깨알같이 적힌 관리법과 함께 난 화분을 들고 집으로 찾아왔다.
용암소심(龍岩素心)이라고 족보 있는 난이니 잘 해서 꽃을 피워보라는데, 평소 난에 대해
별 관심이 없던 나는 ‘어, 그래 알았어!’라며 건성으로 대답하고 난을 받았다.

얼핏 봐도 난은 잎이 쭉쭉 벋었는데, 마치 늘씬한 미녀가 모델 워킹을 하는 것처럼 시원한
모습이었다. 거실 창가에 갖다 놓으니 그 자태가 제법 일품이어서 종이에 적힌 대로 때맞춰
물을 줘가며, 가끔 제법 난을 아는 사람처럼 ‘어, 그 난 참 훌륭하다!’라고 감탄도 해가면서
정성을 들였다. 그러나 문외한의 손길과 정성이 갸륵해 본들 얼마나 가랴? 얼마 지나면서부터
뭐가 잘못됐는지 갑자기 그 늘씬하던 이파리가 늘어지며 시들시들 힘을 잃기 시작하는데 백약이
무효였다. 하나둘 묵은 잎이 떨어진 자리에 새잎이 나기는 나는데 예전처럼 늘씬하게 뻗는 게
아니라 각설이 머리처럼 삐죽삐죽 올라와서는 예전 이파리의 마른 잔해와 뒤섞여, 자다 일어난
아줌마 파마머리처럼 복닥거리는 게 아닌가? 급기야 ‘그러면 그렇지, 족보는 무슨 얼어 죽을
족보야?’하고 난을 뒤란 창고에 집어넣은 뒤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어느 날 아침, 눈을 뜨니 문득 무슨 고귀한 향수 냄새 같은 것이 코끝을
간질인다. 그 향이 너무나 그윽한지라, 향기의 진원지를 찾아서 이리저리 집안을 뒤지다가 마침내
뒤란 창고 문을 열었는데 나는 그 순간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부연 어둠 속에, 볼품없이 꼬부라진 이파리들 사이로 새하얀 꽃을 피워 올리고 처연하게 앉아 있는
난을 발견한 것이다. 화분에는 시커멓게 때가 끼었고, 이파리에는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았다. 부랴부랴
집안으로 다시 들여놓고는 닦는다 물 준다, 부처님께 치성드리듯 온갖 수선을 피웠다. ‘내 어이 너를
몰라봤던고?’라며 이제부터 잘 키우리라 다짐했건만, 며칠 동안 고고한 향을 뽐내던 난은 꽃이 지면서
동시에 이파리도 다 시들어서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 보고서야 믿는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 뒤 차마 버리지 못한 빈 화분을 볼 때마다, 어둡고 외로운 창고 속에서도 꿋꿋이 꽃을 피워 난은
어디에 있어도 난임을 증명한 뒤 미련 없이 자신의 길로 가버린 용암소심 앞에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좋은 생각 2018년 12월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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