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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강의 빨간 모자들
새우골  2009-04-09 03:28:38, 조회 : 968, 추천 : 133


이제 나이가 들었나 보다. 자꾸 옛날 생각이 나니. 아들집에를 다녀 올 일이 있어서 차를 끌고
나섰다가 고속도로를 버리고 국도를 택했다. 옛날 연수실장 시절 뻔질나게 드나들던 남한강
연수원이 문득 생각나서 양평을 경유해 가기로 한 것이다.

요즘은 어떤지 몰라두 그 때 그 시절엔 연수실 직원들은 그야말로 가려 뽑은 최정예 멤버들이라
일화들이 많았다. 특히 신임 과정에서는 그야말로 강의면 강의, 회사정신이면 정신, 외모면 외모,
게다가 자상하게 교육생들 돌봐주지, 마지막 날에 있는 극기훈련에서는 빨간 모자 쓰고 멋있는
훈련 조교까지 소화해 내니....독수리 비슷한 거 그려진 모자에다 람보 주머니주렁주렁 달린 쪼끼
입고 무전기로 '본부 나와라 본부 나와라, 부상자 있어서 업고 하산 중이다, 2포스트에 차량 대기
시켜 주기 바란다 이상!' - 게다가 그 시절이 엄동 설한 12월인데다 그 시간은 자정도 훨씬 넘긴
새벽 한 시,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밤길, 랜턴 하나에 의지해 부상자를 업고 산을 내려 오노라면 등에
업힌 여자 사원은 그야말로 그 따스한 등판이 '007 From Russia with Love'에 나오는 제임스 본드의
등처럼 느껴 지기 마련인 것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아찔한 순간들도 많았었다. 한 번은 일주일 짜리 신임 교육이 끝나고 돌아와서
주말이라고 한숨을 돌리고 있는 차, 한 부하의 부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런데 다짜고짜
'이사님, 아무리 연수교육이 중요하다 해도 사람을 이렇게까지 혹사 시킬 수 있는거예요? 일주일
만에 돌아오자마자 또 교육 출장이라니요? 정말 너무 합니다!' - 이러는 게 아닌가? '무슨 말씀이신지
도무지....' 하다가 앗! 번개처럼 스쳐 가는 어떤 모습. 전날 마무리에서 유난스레 굴었던 한 교육생과
김 대리!!

'아이구 죄송합니다. 워낙 김 대리가 갈 수 밖에 없는 중요한 교육이라서 할 수 없이. 훌륭한 남편
둔 죄이지요. 허허허.'로 얼버무려서 넘겼다.

월요일 출근 - '김 대리! 이리 와!' 강당으로 부른다는 건 학교에서 선배가 화장실 뒤로 부르는
것처럼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알기에 잔뜩 긴장한 김 대리가 따라왔다. 이럴 때는 여러 말 하기가
싫어진다. '신임 끝나자 마자 1박 2일 어디 갔다 왔어?' '대전에 있는 친구 상가에....' '퍽!'
머릿속으로는 주먹이 날아갔지만 그렇다고 어찌 폭력을....'퍽!'은 상상일 뿐이다. 대신 더 무서운 거!
'여러 말 할 거 없어! 당장 사표 써 가지고 와!'  

사표 받았냐구요? 못 받았다. 내가 마음이 약해서 그랬는지....아니면 그 친구가 무릎을 털썩 꿇고
정말 죽을 죄를 졌습니다 라고 하는 데 불쌍했던지....머릿속이야 복잡했지요. 그랬지만 어쨌든 덮어
주기로 했다. 연수 진행자가 교육생 하고 섬씽이 생기면 그 연수실은 해체해야 한다. 연수교육 출장을
핑계로 대고 밀애를 즐긴다면 그 이후 모든 부인들은 연수원 까지 쫓아와서 매일 확인하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불신 속에 무슨 교육이 되리.

  연수 진행자들이 과정 마치고 지하철로 귀가하는데 모두 잠이 들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선반 가방
속에서 자명종이 요란하게 울리는 게 아닌가? 얼떨결에 벌떡 일어나서 끄고 자는데 이번에는 옆 가방에서
또 요란한 자명종 소리....그 친구도 벌떡 일어나서 얼른 끄고 자는데 오 마이 갓! 다시 한 번 울리는 또 다른
종소리!! 진행자들은 혹시 아침에 못 일어날까봐 각각의 자명종 시계를 5분 단위로 알람 맞춰 놓고 쓰다
보니 지하철 안에서 여섯시가 되자 요란하게 5분 간격으로 울려 댄 것이다. 이를 알 턱이 없는 손님들은
'별 미친 놈들 다 보겠네...'하는 표정이다.

  연수는 때로는 노가다이면서도 아주 투철한 회사정신과 상품지식 뿐이랴 경쟁사 것 까지 꿰고 있어야
되고 강의 능력에다 때로는 파티 진행까지도 분위기 띄우며 해야 되는  1인다역의 힘든 자리이다. 그렇다고
특별히 특진을 시켜 주지도 않는다. 다만 전국 지점에 자신의 손을 거쳐간 '맨'들이 활약하고 있어서 어디에를
가도 '몇 기입니다. 그 때 그 점호 때 소주가요....' 라며 다가오는 마음들이 있어서 행복한 것이다.

  그러니 김 대리를 어찌하리. 나에게도 잘못은 있었다. 마지막 날 산악훈련 뒤에 벌어지는 뒷풀이에서는
막걸리에 얼근한 데다 캠프 화이어로 분위기 돋군 데다가 맨 마지막 윤회악수 직전에는 '자 우리 한번 몸
풀어 봅시다' 하고는 디스코를 5분여, 그리고 블루스를 5분여 추게 하는데 이게 화근이었던 것이다. 연이어
지는 훈련과 강의, 그리고 산악훈련을 통해서 다져진 진행자와 교육생의 인간관계가 깜빡 다른 길로 갔던
것이다. 녀석두....교육생들을 감명시키고 교육생들을 사랑하되 절대로 소유는 하면 안 되는 것을.....

  그 사건 이후로 뒷풀이에서 블루스는 금지시켰다. 21세기를 가는 지금의 시대에서 바라보면 참 아득한
옛날 이야기 같다. 요즘이야 자명종 대신 모닝콜일 것이요, 산악훈련은 전근대적 군사문화일 지도 모르고,
사람이 사람을 가슴으로 감동시키려고 하는 연수는 한낮 감상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도
양평대교를 건너 남한강 연수원 곁을 지나노라면 그 날 그 추운 밤.... 산속을 뒹굴며 교육에 여념이 없는
'남한강의 빨간 모자'들의 함성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문득  뒤돌아 보게 된다. 그렇게 청춘을
바쳐 키워낸 회사는 비정하게 나를 버렸지만 말이다....



peppermint
제가 연수실 초창기때 그 김대리하고 연수진행을 많이 다녔었는데.... ㅎㅎ 수년전 회사 사직하고 다른회사로 갔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어디서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 2009-04-21
09:26:35



새우골
그런 끼가 있으니 중간에는 잘 지내지 못하고 풍파가 있었다네.
그러나 결국 다시 합친 걸로 알고 있네. 그리고 몇 년 전 그대로라면
용답동 근처에서 식당을 경영하는 걸로 들었네만....진짜 한 번 연락을
해 보아야 되겠네.
2009-04-22
06:04:16

 


peppermint
중간에 풍파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 이후에 소식을 몰라서 ... 저도 한번 만나보고 싶네요. ^^ 연락처를 몰라서.... 2009-04-22
10:3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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