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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의 길 16 - 사무장의 꿈은 야무졌지만
새우골  2009-04-02 07:10:07, 조회 : 1,052, 추천 : 119


2005년 5월 27일 또 다시 낮선 곳에 섰다. 한 해 전 진천 평사리에 내려갔을 때와 기분은 비슷했다.
다만 이번에는 밭농사가 아닌 폐교를 리모델링한 ‘해산농촌 체험 연수원’을 운영하는 마을 사무장으로
내려 온 것이다.

대강 짐을 풀자마자 이장으로부터 첫 오더가 떨어졌다. 다음 날 연수원에 한 산악회에서 단체 숙박을
오는데 돼지를 한 마리 잡아달라고 했기 때문에 그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목소리도 경쾌
하게 ‘옜-써!’를 외치며 준비에 나섰다. 신임 사무장답게.
아 그러나 이게 웬일?? 마을 사람들이 돼지를 잡고 나더니 한 마리를 척척 각을 뜨고 난 뒤 그 놈을
연수원 식당에 있는 작업대에 갖다 놓는다. 그리고는 이장 왈,

“사무장, 이거 양념 재워서 불고기 거리 준비할 수 있게 뼈 바르고 고기는 전부 썰어 놔!”

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정육점에서나 보았던 기다란 검정 고무 앞치마를 내 몸에 입혀 준다.
영락없는 정육점 아저씨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내가 사무장으로 온 게 아니던가?
사무장이란? 말 그대로 사무(事務)의 장(長)이 아니던가? 얼마 안 있어 바로 안 일이지만 사무장이
사무의 장인 것은 틀림없었지만 문제는 바로 그 사무의 내용이었다.

무애 양주동 박사가 쓴 ‘면학의 서’라는 글을 보면 영어 문법의 인칭을 설명하면서 ‘나는 1인칭, 너는
2인칭, 그 외는 우수마발이 다 3인칭’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牛溲馬勃 - 말 그대로 나와 너를 뺀 ‘소
오줌 말똥이 다 3인칭’이라는 말이다.

그랬다. 농촌관광을 하는 마을의 사무장의 사무는 그야말로 우수마발이 다 그의 담당이었던 것이다.
칼 한 자루를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고기를 뼈에서 발라내기 시작하는데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하는 일이라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벌건 피는 앞치마를 넘어서 온 몸에, 얼굴까지 칠갑이 되고 칼은
이가 빠져가고, 부채꼴처럼 생긴 다리뼈에서 살을 발라낼 때는 아예 고기가  부스러기로 변해 버렸다.
지나가다 얼굴을 들이민 이장은

“아, 고기를 그렇게 다 부스러기로 만들어 놓으면 어떻게 먹으라는 기여?”

하고는 역정을 낸다. 그래도 싫은 표정 하나 짓지 않고 끝까지 돼지 한 마리를 다 발라내서 썰었다.
까짓 거 이런 일 하나도 못하면 무슨 더 큰일을 하랴 싶기도 했고, 김 이사가 언제 정육점 주인처럼
앞치마 두르고 고기 썰어 보랴 싶기도 했고, 어차피 편한 일을 찾아서 내려 온 길은 아니지 않느냐는
심정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된 정육점 아저씨 일은 그 뒤로 계속 되어서 사무장을 그만두는 1년
동안 무려 아홉 마리의 돼지를 뼈를 바르고 고기를 썰어냈다.

그러나 ‘야무진 사무장의 꿈’이 깨어지는 일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고기를 썰어 재워 놓은 다음날,
드디어 50여 명의 손님이 연수원에 도착했다. 드럼통을 반으로 잘라 만든 화로에 숯불을 피우고, 그
곁에 있는 식탁에 야채를 나르고, 고기를 나르고 정신없이 돌아가는데, 문득 나를 돌아보니 이번에는
꼭 무슨 ‘관광농원 가든’ 종업원처럼 변해 있었다.

“어이, 여기 소주 두병 더-”

“어이 여기 고기 한 접시 더-”

“네, 네 바로 나갑니다.”

첫 날 정육점 주인이 되었던 나는 바로 다음날 음식을 나르고 서빙하느라 정신없는 식당 종업원이 되어
있었다. 아마 옛날 회사 동료나 부하, 바로 직전에 일했던 조선일보의 편집부 동료들이 그 모습을 보았
다면 뭐라고 했을까? 어쨌든 그렇게 정신없이 서빙하는 가운데 밤은 깊어가서 자정을 넘긴 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노래방 기계를 운동장에 설치해놓고 가무음곡에 정신없는 사람들은 새벽으로 시간이 가도 그칠
줄을 모르고 안주 심부름, 술심부름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게 아닌가? 그렇게 두 번째 밤이 지났다.

다음 날, 아침을 먹고 난 손님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간 연수원 방에를 들어가 보니 50여명이 밤새 질펀하게
놀고 간 자리는 정말 엉망이었다. 바닥에 엎질러진 술, 뒹구는 휴지, 물이 넘치고 담배꽁초가 난무하는 화장실
- 청소가 시작되었다.

이불을 일일이 개어 넣고 물걸레로 복도와 객실을 모두 닦고, 화장실 청소를 하는데 그 누가 휴지통을 치워
주랴? 푸른색의 커다란 비닐봉지에 휴지통을 비우는데 화장지는 물론 여자 화장실에서는 생리대가 많이도
쏟아져 나왔다.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일일이 휴지를 구겨 넣다가 문득 나를 돌아보니 이번에는 영락없는
청소부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조선조 장만이라는 사람이 쓴 ‘구절양장가’를 보면 ‘풍파에 놀란 사공 배 팔아 말을 사니, 구절양장이 물 도곤
어려웨라’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야말로 진천 평사리에서 밭농사에 놀란 나머지 사무장의 길을 찾아 왔더니
그 또한 밭농사보다 더 어려운 길이었다. 밭농사는 오로지 몸이 힘든 것이었지만 사무장의 일은 위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온갖 자존심을 다 빼놓지 않고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그런 무수한 잡부의 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사무장 아닌 사무장이라는 신분으로 고기를 썰며, 음식을 나르며, 청소를 해대며 시간이 가기
시작했는데 세 달 정도가 흐르자 동촌리는 드디어 그 정겨운 인연의 모습을 한 꺼풀씩 벗어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동촌리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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